2019년, 토드 필립스 감독과 호아킨 피닉스가 함께 만들어낸 영화 《조커(Joker)》는 단순한 코믹북 원작 영화가 아니었다. 고담시의 악당 ‘조커’의 탄생을 다룬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 장르의 문법을 철저히 배반하며, 현대사회의 병리와 인간 심리의 어두운 단면을 강렬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주인공 아서 플렉의 심리 변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불편함과 연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이 영화는 단지 한 남자의 몰락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라, 시스템 속에서 소외된 존재들이 어떻게 붕괴되고 분노하게 되는지를 심도 있게 묘사한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 영화에서 체중 감량, 반복되는 웃음 발작, 무너지는 자아를 극도로 사실적으로 표현해 내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조커》는 그야말로 ‘불편한 걸작’이다. 보는 내내 마음을 짓누르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매혹을 품은 영화다.
🧠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 괴물인가 피해자인가
아서 플렉은 사회적 약자이자 외로운 인물로 시작한다. 광대 분장을 하고 돈을 벌며 살아가지만,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가난하며, 사회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하는 존재다. 그가 웃는 장면은 기쁨이 아닌 통제할 수 없는 신경계의 이상 반응이며, 그의 인생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비가시적인 인간’의 삶이다. 아서는 점점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짓밟히며 조금씩 무너져간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지킬 수 없게 되었을 때, 새로운 자아로 변모하게 된다. 바로 '조커'라는 이름의 존재다.
이 변화는 단순한 캐릭터의 전환이 아닌,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영화는 ‘악’이 개인의 타고난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환경과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준다. 아서의 분노는 정당화될 수 없지만, 영화는 왜 그런 분노가 생겼는지를 철저하게 파헤친다. 이로 인해 관객은 조커를 ‘악당’으로만 규정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아서’였고, 혹은 누군가를 ‘아서’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아서가 조커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순간, 영화는 기존의 영웅-악당 서사를 전복시킨다. 조커는 더 이상 배트맨의 적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거울이자 폭력에 무감각한 세계의 상징이다. 그는 악당이라기보다는 결과이며, 그 결과는 우리가 만든 것이란 사실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 폭력, 분노, 그리고 카오스의 상징
《조커》는 폭력을 매우 불편하게, 그러나 피할 수 없도록 묘사한다. 총격 장면, 살인, 분신, 폭동 등이 이어지며 영화의 후반부는 점차 혼돈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이 폭력은 단순한 자극이 아닌, 억압된 분노가 폭발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사회로부터 무시당한 아서가 조커가 되는 과정은 결국 누적된 고통과 무시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결과다. 그리고 이 폭력은 단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적 폭력에 대한 ‘반사작용’처럼 보인다.
폭력의 미화나 정당화는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이러한 폭력이 얼마나 위험하고 파괴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집단적인 저항의 형태로 번져간다. 고담시에서 벌어지는 혼란은 아서 한 사람만의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쌓여온 불평등, 냉소, 무관심이 한순간에 터져나오는 사회적 분열의 축소판이다.
이러한 폭력의 기저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사회의 냉대가 있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아서를 얼마나 외면했는가? 우리는 누구의 비명을 듣지 못하고 있는가? 이 영화는 그 질문을 충격적이고 불편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 연출과 음악: 예술로 승화된 고통
토드 필립스의 연출은 섬세하면서도 과감하다. 긴 호흡의 클로즈업, 무표정한 아서의 얼굴, 그리고 타이트한 공간에서 느껴지는 고립감은 캐릭터의 심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특히 지하철, 계단, 병실 등 고정된 배경 안에서 반복되는 장면은 아서가 점점 미쳐가는 과정을 시청자에게 체화시키도록 만든다. 시선과 공간의 구성은 이 영화의 미장센을 단단하게 만든 핵심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단연 독보적이다. 그는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완전히 캐릭터에 몰입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른 몸, 기괴한 웃음, 춤을 추는 듯한 움직임까지 모두가 하나의 예술적 퍼포먼스처럼 느껴진다. 그의 연기를 통해 우리는 아서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고, 조커의 광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된다.
영화의 음악 또한 이야기의 전개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힐두르 구드나도티르의 첼로 중심 사운드트랙은 무겁고 낮게 깔리며, 조커라는 존재의 무게를 음악으로 전달한다. 음악과 연기, 연출이 하나의 톤으로 이어지며 《조커》는 단순한 영화가 아닌, 체험이 된다. 그것은 고통의 예술화이며, 어두운 현실의 반영이다.
🧾 결론
《조커》는 불편하고 어둡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현실적이고, 더 인간적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악당의 탄생을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어떻게 한 사람을 붕괴시키는지를 지켜보게 된다. 호아킨 피닉스는 조커라는 인물을 통해 한 인간의 고통, 분노, 광기를 절묘하게 그려냈고, 그로 인해 관객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선 깊은 정서를 경험하게 된다.
이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지금 웃고 있지만, 정말 괜찮은가?” 그리고 그 질문은 웃음을 가장한 비명이 된다. 《조커》는 단지 영화 그 이상이다. 그것은 사회를 향한 경고이자, 인간성에 대한 날카로운 반추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껄끄러움을 느꼈다면, 아마도 그것이 바로 감독의 의도였을 것이다.